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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악 의첨

인악 의첨(仁嶽義沾, 1746~1796) 스님은 조선 후기 불교 교학의 대강백(大講伯)이다. 의첨 스님의 속성은 이씨(李氏), 본관은 성산(星山), 이름은 의선(義宣)ㆍ의소(義沼), 자는 자의(子宜), 법호는 인악(仁嶽)이다.

고려 사공(司空)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 능일(能一)의 23세손이며 아버지는 휘징(徽澄)이고 어머니는 달성(達成) 서씨(徐氏)이다. 1746년(영조 22)에 달성 인흥촌(현 달성군 화원면 본리동, 고려 때 유명한 인흥사(仁興寺)가 있던 곳)에서 태어났다.

8살에 향학에 들어가 소학을 세 번 읽고 다 외워버리니 신동이라는 소문이 인근 고을까지 났다. 15세에 시경, 서경, 역경을 다 읽고, 글을 잘 지어 천재라 했다. 18세에 용연사(龍淵寺)의 가선 헌공(嘉善軒公) 문하로 출가하여, 벽봉(碧峰) 스님에게서 구족계를 받고 교학을 배웠다.

그 후 서악(西岳), 홍유(泓宥), 농암(聾巖) 등 여러 선지식에게 수학하였다. 1768년(영조 44) 벽봉 스님에게 돌아와 법을 이어받고 강당을 열어 설법하였다. 뒤에 영원암(靈源庵)으로 가서 화엄(華嚴)의 대종사(大宗師)인 운파 상언(雲坡尙彦) 스님에게서 화엄경과 선문(禪門)을 배웠다. 비슬산, 팔공산, 계룡산, 불영산 등의 산을 유력하며 경전을 강의했으며 동화사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후학양성에 전념했다.

1790년(정조 14)에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원당(願堂)으로 수원 용주사를 창건할 때, 의첨 스님은 증사(證師)가 되어 〈불복장원문경찬소(佛服藏願文慶讚疏)〉와 〈용주사제신장문(龍珠寺祭神將文)〉을 지으니 정조가 그 글을 보고 크게 칭찬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교학의 양대 산맥으로 호남에는 연담 유일(蓮潭有一), 영남에는 인악 의첨을 꼽았다.

1796년(정조 20)에 비슬산 명적암(明寂庵)에서 입적하니 세수 51세, 법랍 34세였다. 제자들이 다비식을 행하고 동화사와 용연사에 영당(影堂)을 세웠다. 12년이 지난 1808년에 제자들이 스님의 일대기를 기록한 비석을 동화사에 세워 지금까지 전한다.

저서로는 《인악집(仁嶽集)》, 《화엄사기(華嚴私記)》, 《금강사기(金剛私記)》, 《기신론사기(起信論私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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