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고승약사여래 근본도량, 민족의 영산 팔공총림 동화사

석우 보화

선사의 속성은 설(薛)씨이고, 본관은 순창(淳昌)이며, 법명은 보화(普化), 법호는 석우(石友)이다. 을해년(乙亥年, 1875년) 5월 11일에 경남 의령에서 탄생하였고, 본적은 김해(金海)이며, 신라의 홍유 설총(弘儒 薛聰) 선생의 45세손이다. 선사는 소시(少時)에 지혜가 출중하여 사람들로부터 신동이라 불렸다. 시서(詩書) 및 노장(老莊), 제자백가(諸子百家), 지리(地理)는 물론 의학에까지 능통하였다.

30세에 이르러 가사(家事)를 돌보지 않고 운유(雲遊)하기 7, 8년에 우연히 범어사에 이르러 보조어록을 열람하게 되었는데,

삼계열뇌유여화택(三界熱惱猶如火宅)
기인엄류감수장고(其忍淹留甘受長苦)
욕면윤회막약구불(欲免輪回莫若求佛)
약욕구불불즉심시(若欲求佛佛卽是心)

이란 대목에 이르러 홀연 깨친바 있어 불각낙루(不覺落淚)하고 “대도(大道)는 실로 이 문중에 있구나!” 하며 “심전(心田)에 티끌 개고, 성천(性天)에 구름 여니, 춘산(春山)에는 화소조가(花笑鳥歌)하고, 추야(秋夜)에 월백풍청(月白風淸)이로다. 아마도 무위도락(無爲道樂)은 이 밖에 다시 없어라.” 라는 시조 한 수를 읊고 감연 출가의 뜻을 굳혔다.

그 즉시 세진(世塵)을 등지고 금강산(金剛山) 장안사(長安寺)에 이르러 연담응신(蓮潭凝信) 선사를 은사로 낙발(落髮)하니 시년(時年) 38세였다. 법을 겸수(兼受)하고, 후에 유점사(楡岾寺) 동선의정(東宣義淨) 율사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사방 선지식을 널리 참방(參訪)하며 선을 닦은 지 10여 년에 영원암(靈源庵)으로 들었다. 여기서 30여 성상(星霜)을 움직이지 아니하고 참구(參究)하여 깊은 경지에 계합(契合)하였다고 한다.
그때에 시작(詩作)도 많았으니,

산삽위리수용비(山揷爲籬水用扉)
행인도차세정희(行人到此世情稀)
고암라객환다사(孤庵懶客還多事)
정소한운보폐의(淨掃閒雲補弊衣)

란 시도 그때의 것이다.

그 후 중일(中日)사변이 일어나자 그 법제(法弟) 상월(霜月) 율사에게 금강(金剛)엔 이미 연(緣)이 다 되었으니 점차 남행하자 하고는 하동 칠불사(七佛寺)로 옮겨 안주(安住)하다가, 을유(乙酉) 춘(春)에 사주(四洲) 다솔사(多率寺)에 이거(移居) 중 조국광복을 맞았다. 다음에 남해도로 건너가 해관암(海觀庵)을 창건하니 그 곳에서 6.25를 무사히 지내고 해인사로 이주하였다. 정화불사(淨化佛事) 후 대중의 여망에 의해 초대종정에 추대되고 병신(丙申) 3월에 동화사로 이석(移錫)하였다. 세연(世緣)이 다하자 임종(臨終)에 다다름에 시봉(侍奉)이 유게(遺偈)를 청하니 선사는 소리를 높여 “망상을 말라” 한마디 말씀뿐이었다. 물러서지 않는 시봉의 간청에 선사가 부득이 응(應)하여 “그러면 네가 나를 붙들어 일으켜라. 너를 위하여 게를 지으리라” 하며 붓을 들어

낭괄건곤방외척(囊括乾坤方外擲)
장도일월수중장(杖挑日月袖中藏)
일성종락부운산(一聲鐘落浮雲散)
만타청산정석양(萬朶靑山正夕陽)

이라 쓰고 안연(安然)히 화(化)하니, 세수는 84세이고 법랍이 45년이니, 때는 정유(丁酉) 납월(臘月) 이십칠일이었다. 열반소식이 전해지자 평소 선사를 경모(敬慕)하던 수백의 납자와 수천의 신도가 운집하였고 관계기관장들이 참석하여 애모(哀慕) 속에 엄숙히 다비가 거행되었다.

선사의 제자로는 부처님의 심인법을 이은 79대 법손이자 조계종 제13대 종정인 진제(眞際) 선사가 있다. 은사와 상좌가 모두 종정을 역임한 경우는 한국불교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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