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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년 유월 보름법회 --종정예하 법어

관리자 | 2016.07.22 15:47 | 조회 2495





雲峰禪師(운봉선사)의 悟道機緣(오도기연)

    

   

大道切同異(대도절동이)이라

 

何人眼不開(하인안불개)아


後院幾鹿喫草(후원기녹끽초)하고 

 

楊柳上鸚鵡歌(양류상앵무가)로다 

 


대도의 진리는 같고 다름이 끊어짐이라.


어떤 사람이 눈을 뜨지 못했으리요.


집 뒤뜰에는 몇 마리 사슴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버들가지 위의 꾀꼬리들이 정답게 노래함이로다.




















하안거 결제한 지

3개월 중에 어언 2개월이 지나

이제 1개월이 남음이라.


대중들은

남은 한 달 동안에 혼신을 다 해

화두의심에 정력을 쏟을지어다.


병신년 하안거는

육십년이 지나야 다시 옴이니

우리 대중가운데 육십년을

더 산다는 보장이 없으니,

이렇게 세월의 흐름은 빠르고

인생은 덧없음이라.


정신을 바짝 차려

화두일념이 지속되게끔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서

정진하고 정진해야 할 것이라.


금생에

견성하지 못한다면

어느 생에 人身을 받고

이 見性法을 또 만나리오.


금일은

慧月선사의 상수제자인 雲峰선사의

悟道修行 과정을 들어서 말할까 하노라.



운봉선사는

12세에 팔공산 은해사에서

동진으로 출가하시어 經典을 다

섭렵하시고 律藏까지 섬세히 잘 익혀

일등律師의 學德을 갖춤이라.


經과 律의 德相을 잘 갖추었지만은

解脫의 涅槃境地는 遙遠함을 알고,

參禪해서 見性道人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頓發하여 남방에 계신 慧月禪師를 찾아가서

“선사님, 화두하나를 내려 주십시오?”하니

혜월선사께서 “어떤 것이 너의 本來面目인고?”라는

話頭를 내리셨다.


이 화두를 들고

십 여 년을 씨름을 했으나

純一함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래서 오대산 적멸보궁에 가서

100일 기도를 올리며,

‘話頭一念이 現前하고

見性大悟하여 宗風을 드날려

廣度衆生하여지이다’하며

지극한 마음으로 발원기도를 드렸다.


100일 기도를 回向한 후에

백양사 운문암에서 不撤晝夜 精進한 끝에

어느 날 새벽, 禪房門을 열고나오니

밝은 달빛이 온 산을 비추는 것을 보고

화두가 打破됨이로다.


이에

다음과 같은 悟道頌을 읊으셨다.


出門驀然寒徹骨 출문맥연한철골

豁然消却胸滯物 활연소각흉체물

霜風月夜客散後 상풍월야객산후

彩樓獨在空山水 채루독재공산수


문을 열고 나서자 갑작스레

찬 기운이 뼈골에 사무침에

가슴 속에 막혔던 물건

활연히 사라져 버렸네.

서릿바람 날리는 밤에

객들은 다 돌아갔는데

단청누각은 홀로 섰고

빈산에는 흐르는 물소리만 요란하더라.


그리하여

그 당시 부산 선암사에 계시던

慧月선사를 參訪하여 여쭈었다.

“三世諸佛과 歷代祖師는

어느 곳에서 安心立命하고 계십니까?”


이에

慧月선사께서 말없이 앉아 보이시므로

스님이 냅다 한 대 때리니, 혜월선사께서

“옳지 못하고 옳지 못하다”고 하셨다.


운봉선사께서 또 여쭈었다.

“산 용이 어찌 죽은 물에 잠겨 있습니까?”

“그러면 너는 어찌 하겠느냐?”하시는 물음에,

운봉스님이 문득 불자(拂子)를 들어 보이니

慧月선사께서는 부정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옳지 못하고 옳지 못하다”


이에

스님이 다시 應手를 하셨다.

“스님, 기러기가 창문 앞을 날아간 지

이미 오래입니다.”

慧月선사께서 크게 한바탕 웃으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며 흡족해 하셨다.

“내 너를 속일 수가 없구나!”


그리하여

을축년에 ‘운봉(雲峰)’이라는 법호와 함께

상수제자로 봉하시고 傳法偈를 내리셨다.

[을축년, 서기1925년]




付雲峰性粹 부운봉성수


一切有爲法 일체유위법

 

本無眞實相 본무진실상

 

於相若無相 어상약무상

 

卽名爲見性 즉명위견성


雲峰性粹에게 부치노니,


일체의 유위법(有爲法)은


본래 진실된 모양이 없으니


저 모양 가운데 모양이 없으면


곧 이름하여 견성(見性)이라 함이라.







이후로 선사께서는

全國諸方을 行脚하시었다.

그 당시, 경기도 양주 望月寺에서는

諸方에서 發心한 首座들이 30년

結社를 맺어 용맹정진을 하고 있었다.


龍城선사를 祖室로 모시고

禪德으로는 石友선사를 모시고

雲峰선사는 立繩소임을 보셨다.



하루는

용성 선사께서

상당(上堂)하여 법문을 하셨다.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님도 산승을 보지 못하고

역대(歷代)의 모든 조사(祖師)들도

산승을 보지 못하거늘,

시회대중(時會大衆)은

어느 곳에서 산승을 보려는고?


이 때 운봉 선사께서 일어나 답하시기를,

"유리독 속에 몸을 감췄습니다."

[琉璃瓮裏藏身]하니, 용성 선사께서는

아무 말 없이 즉시 법상에서 내려오셨다.


아주 멋진 진리의 문답이다.


두 분 선사의

이 問答處야말로 千佛萬祖師가

출세하여 점검하신다 해도

흠잡을 곳이 없는 擧揚이다.







향곡선사께서

山僧에게 이 대문을 들어서

“만약 진제 네가 용성선사가 되었던들

무엇이라고 점검하려는가? ”하고 물으시길래

산승이 “眞獅子善能獅子吼(진사자선능사자후)

참 사자가 사자다운 사자후를 하는구나.“ 라고

답을 했음이라.


이 한 마디가 있었다면

그 法席은 더욱 빛났을 것이다.







운봉선사께서

그 후 덕숭산 수덕사에서

滿空선사를 조실로 모시고

 공부하실 때였다.


하루는

만공 선사께서 ‘양생고자화(孃生袴子話)’를

들어 법문하시기를, 옛날에 운거(雲居)도인께서

出世하여 會上을 여시니, 각처에서 雲水衲子와

檀越들이 모여들어 법문을 듣고 지도를 받았다.


당시에

운거 도인께서 주(住)하시던 山內의

어느 암자에는, 수십 년 동안 혼자

정진해 오던 한 스님이 있었다.


그런데 그 토굴스님(庵子僧)은,

운거 도인께서 住山하여 여러 해 동안

법을 펴도, 한 번 내려와서 인사를 한다거나

법문을 듣는 적이 없었다.


그래서 하루는 운거 도인께서

그 토굴스님을 점검해보고자

시자에게 이르셨다.

"네가 암자에 올라가서 토굴스님이

참선하고 앉아 있거든, 동쪽에서 서쪽으로

갔다가 다시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는

거동을 한 번 해 보여라."


시자가 암자에 올라가

운거 도인께서 시키신 대로 행해 보였는데,

토굴스님은 坐禪 상태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시자가 다가가서 인사를 하고는 물었다.

"산중 큰절에는 운거 도인께서 회상을 열어

여러 해 동안 대중을 위해 法을 설하고 계시는데,

스님은 어찌하여 한 번도 내려오지 않으십니까?"


그러자 토굴스님은,

"설령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出世하셔서 온갖 법문을 설(說)하시더라도,

나는 귀기울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시자가 내려와서

운거 도인께 사실대로 말씀드리니,

그 때가 마침 여름철인지라, 운거 도인께서는

잘 지은 삼베옷을 한 벌 싸주시면서

토굴스님에게 갖다 주라고 하셨다.


시자가 다시 그 암자에 가서,

"이것은 큰절 조실 스님께서 주시는 옷입니다."

하며 옷을 전하자, 토굴스님은

"부모에게 받은 옷만 해도 일생 입고 남는데,

어찌 이것을 입을까 보냐?"

하면서 옷을 내밀어 버렸다.


시자가 돌아와 사실대로 아뢰니

운거 도인께서 다시 이르셨다.

"그러면 네가 걸음을 한 번 더 해라.

가서 "부모에게 나기 전에는

무슨 옷을 입었습니까?"하고 물어 보아라."


시자가 다시 또 암자에 올라가서,

"부모에게 나기 전에는 무슨 옷을 입었습니까?"

하고 묻자, 토굴스님은 여기서 그만 말문이 막혀

벙어리가 되어 버렸다.


운거 도인께서 그 사실을 전해 들으시고는,

"내 일찍이 그 수좌를 의심했노라."

라고 말씀하셨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토굴스님이

앉은 상태에서 몸을 벗어 버려, 山中 대중들이

다비를 했는데, 이 때 오색광명과 사리(舍利)가

나왔다하여 온 산중이 떠들썩하자

운거도인께서 다비장에 가서

“사리를 가져오라”해서 오색광명이 떠 있는 가운데

사리를 觀하자, 사리가 흔적도 없이 사리지고

오색광명도 즉시 사라져 버렸다.


이 일로 인하여

온 산중이 떠들썩하자, 운거 도인께서

“앉아서 이 몸을 벗어 버리고

사리가 나와서 오색광명을 놓는다 해도,

내가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옷을 묻던 당시에

한 마디 바른 답을 하는 것에 미치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만공 선사께서

이 법문을 하시고는 대중을 향해 물으시기를,

“토굴스님이 진리의 법을 알았다면

어째서 ‘부모미생전’에 무슨 옷을 입었는가?

하는 데에 답을 못했으며, 만약 알지 못했다면

어째서 오색광명과 사리가 나왔는가?

대중은 말해보라.”


이에 운봉 선사께서 일어나셔서,

"여름에는 안동포를 입고

겨울에는 진주 목화 옷을 입습니다."

라고 멋진 답을 하셨다.


만공선사께서 아무런 점검을 하지 않았으니

조실 노릇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당시에 훌륭한 큰스님들이 많았으나

운봉선사의 기봉을 당할 자가 없음이라.


선사께서는 老年에는

기장의 월내 묘관음사에 주석하심이라.

일일(一日)에 향곡선사가 묻기를

“스님 언제 入寂하시렵니까?”하니

“토끼꼬리 빠지는 날 가지.”라고 말씀하셨다.

과연 2월은 묘(卯)월이니 토끼 달이었다.


음력 2월 29일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마지막 법문을 하시니,

“선사님께서 가시면 누구를 의지해서

지도를 받아야 합니까?”하니

운봉선사께서는

오른손으로 자리를 치시면서 육자배기를 읊으시니,

“저 건너 갈미봉에 비가 묻어오는데

우장 삿갓을 두르고서 김을 매러 갈거나.

道를 道라하면 道가 아닐세.”



[주장자(拄杖子)로 법상(法床)을 한 번 치시고 하좌(下座)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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