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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화선 대법회(10월 15일) 종정예하 법어

관리자 | 2016.11.08 10:35 | 조회 1992

간화선 대법회(10월 15일)


종정예하 법어



建法幢立向上宗旨는 錦上添花요

건법당립향상종지   금상첨화


透過荊棘林하고 解開佛祖縛하면

투과형극림     해개불조박


得隱密田地리니 諸天捧花無路하고

득은밀전지     제천봉화무로


外道潛窺無門이라.什麽人恁麽來오?

외도잠규무문   심마인임마래



 

법의 깃발을 세우고 

향상(向上)의 종지를 세움은

비단 위에 꽃을 더함이요.


가시덤불을 뚫어 지나가고

부처님과 조사의 얽힘을 풀어 열면

은밀한 땅을 얻으리니


모든 하늘 천신이 

꽃을 올리려 해도 길이 없고

외도들이 가만히 엿보려 해도 문이 없는지라.

어떤 사람이 이렇게 옴인고?



이 뒤에 드는 법문을 잘 보라.

 

모든 사부대중은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근원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기의 본분사(本分事)를 해결해야 됨이로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오매불망(寤寐不忘) 간절히 뼈골에 


사무치는 각자의 화두를 들어 일념이 지속되도록 혼신의 정력을 


다 쏟아야 함이로다.


 

일념(一念)이 지속되는 과정이 오지 않으면 수 천, 수 만 생(生)을 


수행해도 아무 소용이 없음이로다. 이 일은 생사(生死)에 자재(自在)의 


분(分)을 갖추고 역겁세월이 지나도록 진리의 낙(樂)을 수용하는 일이로다.


 

중생은 다겁 생으로 중생의 습기만 익혀왔기 때문에, 대신심(大信心)과 


대용맹심(大勇猛心)을 가지고 화두(話頭)를 챙기는 가운데 의심을 쭈욱 


밀어주고, 또 챙기고 밀어주어 하루에도 천번만번 밀어주어 번뇌와 망상이 


들어올 틈이 없도록 공부할지어다.


 

그렇게 정성껏 잡도리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화두가 익어져서 


밤낮으로 화두가 흘러가다가 문득 참의심이 발동이 걸리게 되는데, 


그때는 보는 것도 듣는 것도 잊어버리고, 앉아있어도 밤이 지나가는지 


낮이 지나가는지 모르게 되나니, 이러한 일념삼매(一念三昧)의 과정이 


와야만 홀연히 보는 찰나 듣는 찰나에 화두가 박살이 나게 됨이로다.


 

그리하면 어떠한 법문에도 석화전광(石火電光)으로 바른 답이 흉금(胸襟)


에서 흘러나와 대장부의 활개를 치게 됨이로다.

 

화두참구(話頭參究)을 하되 활구참선을 해야 함이로다. 


그러면 어떠한 것이 활구(活句)냐? 일천성인의 정액상(頂額上)의 


일구(一句)를 투과해야만 활구의 세계를 알고 활구의 눈을 갖추어야 


불조(佛祖)의 스승이 됨이요, 일천 성인의 정액상의 일구를 투과하지 


못하면 일일법문(一一法門)에 정해정식(情解情識)의 시비분별이 항시 


따라다니니, 이것을 일러 사구라 함이로다.


 

그래서 고인(古人)이 말씀하시기를, “활구(活句)하에 알아갈 것 같으면 


불조의 스승이 됨이나, 사구(死句)하에 알아갈 것 같으면 자기도 구원하지 


못 한다”라고 했으니, 활구와 사구의 차이가 이와 같음이라. 일천 성인의 


정액상의 일구를 투과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릇 지도하게 되는 원인이니, 


응당히 다시 참구하여 활구를 투과해야 옳음이라.


 

활구참선으로 대오견성(大悟見性)하여 여탈자재(與奪自在), 살활종탈(殺活縱奪), 


기용제시(機用齊示)의 이러한 자재의 수완을 갖출 것 같으면, 활구의 대종사가 


되어 불조(佛祖)의 스승이 되고 인천(人天)의 스승이 되리라.


 

화두가 있는 이는 갖자의 화두를 챙기되, 


화두가 없는 이는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인가?’ 하고

 

매불망 의심하여 일념(一念)이 지속되게끔 혼신의 노력을 하여야 됨이로다.



금생(今生)에 이 견성법을 해결하지 못하면 어느 생(生)에 또 만나리오. 


그러니 모든 대중은 일상생활(日常生活) 속에 간절히 화두와 씨름하여 


의심이 지속되게끔 노력하고 노력할지어다.


 

중국(中國) 당(唐)나라시대에 


측천황후(則天皇后)가 제위(帝位)에 올라 정권(政權)을 잡은 이후에 


천하제일(天下第一)가는 지혜(智慧)의 눈을 가진 선사(禪師)를 모셔서 


사심 없는 지혜의 안목으로써 선정(善政)을 펼치겠다는 각오로 수소문 


끝에 혜충선사(慧忠禪師)와 신수선사(神秀禪師)를 궁중(宮中)으로 모셔와 


두 분 가운데 도(道)가 장한 한 분을 국사(國師)로 모시기로 했다.

 

측천황후가 당나라의 천황(天皇)이 되었지만 진리에 대해서는 까막눈인지라 


어느 분의 道가 장한지를 가릴 수가 없었다.


 

참선(參禪)을 잘 해서 진리(眞理)의 도안(道眼)이 열리면 


법문(法門) 한 마디를 던지면 장단(長短)이 드러나는데 


그러한 안목(眼目)을 갖추지 못하였으니 계교(計較)하다가 


한 생각이 떠올라, 시녀를 목욕탕에서 때밀이를 하게끔 시켰다. 


그래서 시녀가 두 선사를 차례로 목욕 시봉을 하게했다.


 

그 후 시녀에게 묻기를 “어떠 하더냐?” 하니, 


시녀가 목욕시봉한 것을 측천무후께 말씀을 올리니, 


측천황후가 듣고 말하기를 “入水(입수)에 見長人(견장인)이니라”

 

그리하여 남양혜충 선사를 국사(國師)로 모시니, 선정(善政)을 


잘 하시어 삼대(三代)에 걸쳐 국사로 지내심이로다.


 

측천황후가 선정(善政)을 잘 하시다가 큰


왕자(王子) 숙종(肅宗)에게 황위(皇位)를 넘겨 줌이라. 


숙종은 충국사(忠國師)를 더욱더 신심(信心)으로 잘 받들었다.


 

아침 조회(朝會) 시는 친히 숙소(宿所)에 가서 


선사(禪師)를 수레로 모시고는 손수 몰고 오시고, 


조례가 끝나면 수레에 모시고 숙소로 감이로다. 


얼마나 존경하여야 수레에 모셔오고 모셔가고 하시겠습니까. 


감탄함이로다.


 

하루는 

숙종황제(肅宗皇帝)가 혜충국사를 방문하여 한 가지 청을 드렸다. “


서천인도(西天印度)에서 온 대이삼장(大耳三藏)스님이 


타심통(他心通)을 하여 모든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 하니, 국사님께서 한번 시험해 보십시오.”


 

국사께서 대이삼장을 불러 물으시기를, 


“그대가 타심통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고 했는가?” 하니, 


대이삼장이 ‘그러하다’고 답했다.

 

국사께서 가만히 계시다가 물으시기를 


“노승(老僧)의 마음이 지금 어디에 있는고?” 


“스님께서는 일국(一國)의 스승이어니 어찌하여 


촉나라 강(江)위에 배들이 경주하시는 것을 보고 계십니까?”


 

국사께서 가만히 계시다가 


“노승이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 


“스님께서는 일국의 스승이어니 어찌하여 


천진교(天津橋) 상(上)의 원숭이들이 희롱하고

 

있는 것을 보고 계십니까?”



국사께서 가만히 계시다가 “

지금은 노승이 어디에 있음인가?” 


대이삼장스님이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음이라. 


국사(國師)께서 큰 소리로 


“타심통이 어디에 있음인고!”하고 꾸짖으셨다.


 

삼장스님이 


두 번째 까지는 알았는데 세 번째는 왜 몰랐을까? 


세 번째는 대이삼장스님 뿐만 아니라 삼세제불(三世諸佛)과 


모든 도인(道人)들도 알지 못함이라. 왜 그러한가. 


무심삼매(無心三昧)에 들면 다 보지 못함이로다.


 

석일(昔日)에 어느 스님이 조주선사(趙州禪師)에게 


“세 번째는 충국사(忠國師)가 어디 있었기에 


삼장법사(三藏法師)가 보지 못했습니까?” 하고 물으니, 


“삼장스님의 콧구멍 속에 있었느니라.”하셨다.


 

후에 어느 스님이 현사스님(玄沙禪師)에게 묻기를, 


“삼장스님의 콧구멍 속에 있었는데 왜 보지 못했습니까?”하니, 


“너무 가까워서 보지 못했느니라.”하셨다.


 

대중(大衆)은 


세 분, 네 분 선사의 용심처(用心處)를 아시겠습니까? 


혜충선사(慧忠國師), 조주선사(趙州禪師), 현사선사(玄沙禪師), 


대이삼장(大耳三藏)의 용심처(用心處)를 아시겠습니까?



삼개사개 선사(三介四介 禪師)들이 농니단한(弄泥團漢)이라.


시자(侍者)야! 차를 다려 네 분의 스님들께 올려라.



 

또 어느날 


숙종황제가 혜충국사를 참방(參訪)하여 여쭙기를 


“선사님께서 열반(涅槃)에 드시면 무엇을 해드리리까?"하자, 


혜충국사께서 답하셨다. “노승(老僧)을 위해 무봉탑(無縫塔)을 


조성(造成)해 주십시요.”


 

숙종황제가 다시 여쭙기를 


“탑(塔)의 모형을 내려 주옵소서.” 


혜충국사께서 양구(良久)하고 계시다가 


“會麽(회마)아”-(“알겠는가?”) “


모르겠습니다.”


혜충국사께서 

“그러면 이후에 나의 제자(弟子) 탐원(耽源)을 청해서 물어보십시오.”



무봉탑을 묻는데 아무말 없이 앉아있는 도리(道理)는 무엇인고?

 

후에 설두선사(雪竇禪師)가 송(頌)을 하시기를,


無縫塔見還難(무봉탑견환난)이라


澄潭不許蒼龍蟠(징담불허창룡반)이로다.


層落落影團團(층락락영단단)하야


千古萬古與人看(천고만고어인간)이라.




시회대중(詩會大衆)은 


혜충국사(慧忠國師)와 설두선사(雪竇禪師)를 회마(會麽)아?

 

하늘과 땅을 꿰뚫고 넓은 파도가 치고 쳐서, 


백랑(白浪)이 하늘까지 치솟는 그 가운데서 


전신(轉身)하여야 혜충국사와 설두선사 두 분을 바로 보리라.


 

석일(昔日)에 당나라때 백장선사(百丈禪師)가 많은 대중이 


운집(雲集)하여 대회상(大會上)을 여니, 발심(發心)한 스님들이 


많이 모여 참선정진(參禪精進)에 몰두 하였습니다.

 

일일(一日)에 지리를 잘 보는 풍수객(風水客)이 와 


백장 방장선사(方丈禪師)에게 말하기를,


대위산(大潙山)에 무수 도인이 나올 천하명당이 있으니, 


주인(主人) 한 분을 가려 주십시오.” 하니, 


백장선사가 대중(大衆)을 모아놓고 


법상(法床) 앞에 몽침(木枕)을 놓고, “한 마디 일러라.”하니, 


유나 소임을 보는 스님이 답하기를 


“유리병이라고는 이르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그 답 가지고는 아니다. 또 누가 이를 자 없느냐?”하니, 


별좌 보는 영우(靈佑)스님이 나와 몽침을 차고 들어가니, 


“대위산(大潙山) 주인이 됨이니 바랑을 싸고 가라.”하셨다.


 

대위산에 가서 십년을 기다려도 한 사람도 찾아오는 이가 없음이라. 


위산(潙山)스님이 하루는 생각하기를, 


‘대위산과는 내가 인연이 없는 것 같다.’하고, 


바랑을 싸서 산을 내려오니, 산짐승들이 길을 막고 있음이라. 


그래서 다시 올라와서 있으니 사방(四方)에서 스님들과 


신도(信徒)들이 모여들어 가람을 짓고, 천오백 대중이 


운집(雲集)한 대회상(大會上)을 이룸이로다.

 

그 회상에 발심한 영운 스님은 밤낮으로 화두와 씨름하여 


삼십년간 세월이 흘러가도 흘러간 줄을 모름이라. 


일일(一日)의 봄날에 절 정원에 있는 복숭아꽃이 


만발함을 보고 대오견성(大悟見性) 함이로다.


 

도(道)를 깨달은 오도송(悟道頌)을 읊기를,


三十年來尋劍客삼십년래심검객)여


幾會葉落幾抽技(기회엽락기추지)아


兹從一見桃花后자종일견도화후)로


卽至如今更不疑(즉지여금갱불의)라.


 

위산 방장스님께 올리니 보시고는, 


“자연인연(自然因緣)을 쫓아 깨달은 자는 


만년(萬年)토록 매(昧)하지 않는다.” 하고 극찬을 하심이로다.


 

그 당시에 현사선사(玄沙禪師)는 영운(靈雲)스님의 


오도송(悟道頌)을 보고는 달리 평(評)을 하심이라. “


諦當甚諦當(제당심제당)하나, 


노형이 堪保未徹在(감보미철재)로다.”함이로다.


 

위산도인은 천오백 대중을 지도(指導)하는 대선지식(大善知識)이요. 


현사선사는 일방(一方)의 선지식(善知)이라.


평(評)이 왜 같지 않는고?

 

大衆 會麽(대중 회마)아? - 대중은 알겠는가?


[대중이 말이 없으니, 스스로 점검하여 말씀하시기를 ]


只許老胡知(지허노호지)하고

不許老胡會(불허노호회)로다.

 

[주장자로 법상을 한 번 치고 법상에서 내려오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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