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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사 사적비 번역-우당거사 지음

김능곤 | 2020.08.23 18:47 | 조회 579

동화사 사적비 전문을 번역하였습니다.

사적비를 지으신 분은 자당거사(藉堂居士)가 아닌 연뿌리 우자 우당거사(藕堂居士)입니다.

동화사홈페이지부터 자당거사로 잘 못 표기되어 모든 곳에 자당거사로 쓰이고 있습니다.

번역하신 분은 우당거사의 장손 김명곤입니다


동화사사적비명 병서

불법이 동점(東漸)한 때로부터 나라에서 신봉했기 때문에 사찰이 명승지에 별처럼 널려 있어 종소리가 서로 들릴 정도이다. 동화사도 그 중의 하나인데, 으뜸가는 고찰이다. 그러나 때에 따라 흥성했다가 쇠퇴하는 것은 마치 봄에 왔던 제비가 얼마 지나지 않아 떠나가는 것과 같았다. 살펴보니, 극달존숙(極達尊宿)이 부악(父岳)의 남쪽 중턱에 ‘유가(瑜伽)’라는 편액을 단 절을 창건한 때는 바로 신라 소지왕(炤智王) 15년 계유년이었다. ≪여지승람(輿地勝覽)≫을 살펴보니, 이 산을 부악이라 칭했는데 국기(國畿)의 중앙에 가깝기 때문에 중악(中岳)이라 칭하기도 했다. 나라에서 이곳에 제천단(祭天壇)을 설치해서 나라를 위한 중요한 산악이었기 때문에 공산(公山)으로 개칭했다. 동사(東史)에서 심지왕사(心地王師)의 행적(行跡)을 살펴보니, 왕사가 미륵보살로부터 전해오는 간자(簡子) 중에 8, 9 두 개를 속리산의 영심법사(永深法師)에게 얻어서 이곳에 보장(寶藏)했는데, 고려 예종(睿宗) 때에 이르러 왕이 대내(大內)로 가져와서 우러러보며 공경하다가 9자(九者) 한 간자를 잃어버리고 매우 미안하게 생각하여 송(宋)나라에서 온 불아(佛牙)를 대신 보내주었는데, 본사(本寺)에서는 미륵의 유훈(遺訓) 중 8자(八者)는 신훈성불종자(新熏成佛種子)이니, 공산에 환봉(還奉)한 것은 흔치 않은 서징(瑞徵)이므로 기념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공산(公山)’이란 두 글자 위에 ‘여덟팔[八]’자를 더하여 이름을 팔공산(八公山)이라고 했다고 한다. 처음 창건한 때로부터 340년이 지난 흥덕왕(興德王) 7년 임자년에 이르러 심지왕사가 다시 창건했다. 동사에서 심지왕사의 행적을 살펴보니, 왕사는 바로 헌덕왕의 아들인데 태어나면서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으며 천성이 부드럽고 총명하였다. 나이 15세에 채색 옷을 벗고는 스승을 따라 불도에 부지런히 힘써 중악에 머무르고 있을 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그 뒤에 사방을 유람하며 가야산에 있는 봉서사(鳳棲寺)에 이르러 희랑조사(希朗祖師)를 뵈었고, 속리산에 있는 동관음사(東觀音寺)에 나아가 영심법사를 뵙고 미륵상생경(彌勒上生經)과 예참간자(禮懺簡子) 8, 9 두 개를 얻어서 돌아오니 산악의 신이 두 선자(仙子)를 데리고 마중 나왔다. 산마루에 이르러 “좋은 땅을 골라 성간(聖簡)을 봉안하려 하니 세분 군자와 함께 좋은 곳을 고릅시다.”하고 신들과 함께 산봉우리에 올라가 간자를 던지니 간자가 바람에 나부껴 임천(林泉)에 떨어졌다. 그래서 그곳에 집을 짓고 간자를 봉안했다고 한다. 지금 첨당(籤堂) 뒤에 있는 작은 우물이 바로 그곳이다. 그때 하늘에서는 기쁜 듯이 비가 내리고 오동나무에 꽃이 피었기 때문에 ‘유가(瑜伽)’를 고쳐 ‘동화(桐華)’로 편액을 달았다. 102년이 지나 경순왕(敬順王) 7년 갑오년에 이르러 영조선사(靈照禪師)가 세 번째 창건했다. 이보다 앞서 고려 태조(太祖)가 견훤(甄萱)의 군사들과 오동나무 숲 아래서 대전(大戰)을 벌릴 때 사리탑을 따라 방광회(放光會)에서 영조선사를 만나보고서 화를 면하고는 감격하였다. 그래서 이때에 이르러 탑과 묘(廟)를 엄수(嚴修)하고 전우(殿宇)를 크게 하고 선사가 거처하던 방을 넓혔다. 부속 암자 뒤에 있는 일인석(一人石)은 왕이 선사를 만났던 곳인데, 한 사람은 왕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그러니 그 고적은 경모하여 손으로 어루만질 만하다. 256년이 지나 고려 명종(明宗) 20년 경술년에 이르러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가 네 번째 창건했는데, 7년이 지난 정사년에 보조국사는 병발(甁鉢)을 가지고 지리산에 있는 무주암(無住庵)으로 이주했다가 3년이 지나 다시 거처를 송광사(松廣寺)로 옮겼다고 한다. 108년이 지나 충렬왕(忠烈王) 24년 무술년에 이르러 홍진국사(弘眞國師)가 다섯 번째 창건했으며, 308년이 지나 조선 선조(宣祖) 39년 병오년에 이르러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여섯 번째 창건했다. 이것은 임진년의 전역(戰役) 때에 불우(佛宇)와 승료(僧寮)가 모두 불타버렸기 때문에 사명대사가 해인사(海印寺)에 있을 때 도제(徒弟)인 학인(學仁)과 사승(寺僧)인 천령(天靈), 해진(海眞), 옥보(玉寶)를 보내어 완공한 것이다. 75년이 지나 숙종(肅宗) 3년 정사년에 이르러 상은대사(尙訔大師)가 일곱 번째 창건했으며, 55년이 지나 영종(英宗) 8년 임자년에 이르러 관허(冠虛), 운암(雲巖), 낙빈(洛濱), 청월(晴月) 등이 마음을 같이하여 여덟 번째로 창건했는데, 이 또한 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을사년에 모든 불사(佛舍)가 화재를 당하여 네 분 스님이 함께 경영한 것이다. 살피건대, 석존(釋尊)의 사리(舍利)는 신라 진흥왕(眞興王) 10년 기사년에 소양제(蕭梁帝)가 사신 심호(沈湖)를 파견하여 사리 한 상자를 보냈다. 왕은 감사하고 경사스러운 마음을 이기지 못해 마침내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스스로 호를 법운(法雲)이라고 하였다. 진평왕(眞平王)은 법운의 손자인데, 즉위한 지 4년이 되는 임인년에 사리를 여러 사찰에 나누어 봉안할 때 유독 이 사찰에는 1,255과(顆)를 봉안하고 나서 나라의 복을 비는 원당(願堂)으로 삼았다. 경문왕(景文王) 3년 계미년에 조가(朝家)에서 또 7립(粒)을 이곳에 봉안하면서 그 글에 이르기를, “저 성교(聖敎)가 베푸는 이익은 다단하다. 업장(業障)을 진멸(殄滅)하고 널리 만물을 이롭게 하는 데는 탑을 세워 예참(禮懺)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오동나무 숲 원당 앞에 연대(蓮臺)의 업(業)을 높이려고 석탑을 새로 세우는 것은 동자(童子)가 모래 모으던 뜻을 본받기를 바라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헌강왕(憲康王) 원년 을미년에 석삼강(釋三剛)이 탑을 금당(金堂)으로 옮겨 봉안했는데, 조선 중종(中宗) 38년 갑진년에 종친(宗親) 해달(解達)이 중수(重修)하고, 숙종(肅宗) 원년 을묘년에 인화도수(印花道修)가 다시 중수했다. 철종(哲宗) 4년 임자년에 포운(布雲), 양운(兩運) 두 분 스님이 이어서 지붕을 이었고, 가까이는 신축년에 회응(晦應)스님이 갈라진 돌을 바꾸고 이지러진 부분을 고쳤다. 이어서 보응(普應)스님이 금탑(金塔)에 철난간을 두르고 설운(雪雲)스님이 대웅전 앞에 돌계단을 놓은 것은 빛이 나고 신령스러운 사적(史蹟)이었다. 귀중품은 불사리(佛舍利), 불아(佛牙), 금강저(金剛杵), 패엽경(貝葉經), 오동향로(烏銅香爐), 고동향로(古銅香爐), 상형향로(象形香爐), 부도(浮屠), 비석(碑石)이다. 아, 이 절이 있은 때로부터 지금까지 1,439년이 흘렀는데 더욱더 창대하니, 여래(如來)의 가르침을 시세(時世)에 천양하는 데 승려와 신도들이 얼마나 급히 달려왔는지 상상할 수 있다. 어느 날 현 주지 황보응(黃普應)이 나에게 부탁하기를, “이 절에는 옛날에 사적비가 있었지만 오랜 세월에 걸친 물결과 바람에 닳아 없어져 단지 해진 종이에 희미한 먹 글씨로 남아있으나 그것조차도 요연(瞭然)하지 않으니 만약 어물어물 지나버린다면 전인(前人)들의 위적(偉績)이 장차 세상에 전해지지 않아 후인(後人)들로 하여금 글자가 만들어지기 전의 세계에 산다는 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할 것이네. 이것이 두려워 몇 년 전부터 대개 상고할만한 역사 속에서 찾아서 여러 사람에게 묻고 상의하니 의견이 모두 같아 이것을 돌에 새기고자 하니 그대는 수고를 아끼지 말게.”하였다. 나는 일찍이 황군과 동창으로 수학(修學)한 교분이 있고 공문(空門)에서 인연도 있으므로 의리상 역사에 대한 안목이 없다는 이유로 사양할 수 없었다. 그래서 위와 같이 서술하고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석가모니 도 깨달아 삼계(三界)의 스승 되어

기회 따라 설법하고 방편으로 자비했지

중생의 심한 고통 제도(濟度)하려 기약하니

광채 입은 대천(大千)에 안 믿을 자 그 누군가

공악의 남쪽에 훤히 트인 범궁(梵宮)을

창수(刱修)한 석덕(碩德)들이 차례로 세운 큰 공덕

신기(神祇)가 옹호하여 선종 교종 종통(宗通)했네

법보(法寶)인 사리는 세상에 주는 복이 무궁하지

진실로 귀의하면 남 이롭고 나 이롭고

배구흥왕(倍舊興旺)시키는 데 어찌 후사(後士) 기다릴까

이전 공적 지금 계책, 선행이 없어질 리 없지

서술한 것 돌에 새겨 그 아름다움 나타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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