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등놀이약사여래 근본도량, 민족의 영산 팔공총림 동화사

사진출처 : 달구벌관등놀이 홈페이지(http://www.gwandeung.or.kr)


행사개요
  • 일시 : 매년 봄, 부처님오신날 한 달 전부터
  • 장소 : 대구시내, 두류공원, 신촌 둔치
  • 행사내용 : 점등식, 전통등 전시회, 각종 문화공연, 연등행렬 등

형형색색
달구벌관등놀이
1955년 시작된 제등행진이 1996년 새롭게 단장되어 문화축제로 발전된 것이 연등축제이다. 1,300여 년간 이어져 온 연등 문화를 주제로 한 종교축제이자 전통문화축제로 삶의 어둠과 고통을 걷어내고 지혜와 자비가 충만한 새 세상을 기원하는 불교의식을 국민축제로 승화한 행사이다. 사라져가는 전통등의 복원과, 남녀노소가 흥겹게 어우러졌던 관등놀이의 계승을 모색하는 연등축제는 10만여 개의 오색등이 수놓은 밤의 장관을 만날 수 있다. 연등축제는 2012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 122호로 지정되었다.

형형색색달구벌관등놀이(이하 달구벌 관등놀이)는 해마다 사월 초파일 무렵에 전국 각지에서 행해지는 연등축제 가운데 하나로, 대구지역만의 특색 있는 이름을 부여한 것이다. 형형색색(形形色色)은 연등의 모양과 색깔이 각양각색임을 표현한 것이고, 달구벌(達句伐)은 대구(大邱)의 옛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관등놀이는 고래로 내려오던 우리민족의 고유한 전통문화인 관등놀이에서 따왔다.

매년 석가탄신일을 앞두고 열리는 달구벌 관등놀이는 2010년 12월 대구불교총연합회 출범 이후 시민축제 컨셉을 강화하고 있다. 2014년부터는 기존 두류공원 야구장에서 신천 둔치로 행사장을 옮겨 각종 문화체험 프로그램을 보강해 시민들의 접근성 및 참여도를 높였다. 초파일 한 달 전쯤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및 동성로 야외무대에서 ‘희망의 달구벌 점등식’을 시작으로, 중동교 신천 둔치 일대에서 ‘달구벌 관등놀이’가 개최되며, ‘연등회 법요식 및 연등행렬’이 초파일 일주일 전쯤 두류네거리~반월당 네거리에서 열리게 된다.

점등식은 석가탄신일이 임박했음을 알리고 시민의 안녕과 대구시의 발전을 기원하는 행사로 개식, 삼귀의, 반야심경, 찬불가, 점등, 축원, 축사, 기원돌기, 사홍서원, 폐식의 순으로 이루어진다.

전통등 전시회는 한지와 빛의 어울림을 자랑하는 순서이다. 문헌으로 전하는 용등, 봉황등, 호랑이등, 수박등, 거북등, 잉어등, 북등 등 수십 가지의 전통등을 재현하여 전시하는 자리로 오랜 역사 속에 민중의 소망을 담아 왔던 다양하고 아름다운 전통등을 만날 수 있다.

연등행렬은 취타(吹打)와 사물놀이가 분위기를 돋우고 흰코끼리, 용, 연꽃 모양의 장엄등과 깃발, 10만여 개의 오색등이 물결을 이룬 가운데 종로 거리에서 이루어진다.

회향한마당은 연등행렬 참가자와 시민들이 자유롭게 어우러져 강강술래, 기차놀이 등 한국 고유의 대동놀이를 즐기는 순서이다.

전통문화마당은 한국의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순서이다. 사물놀이, 제기차기·투호·널뛰기·팽이치기·굴렁쇠굴리기·칠교놀이·윷놀이 등의 민속놀이, 바라춤·나비춤·승무 등의 불교 전통 춤과, 줄타기, 판줄공연, 불교 전통음악인 범패시연, 수화공연, 선무도시범 등이 펼쳐진다. 이와 더불어 등만들기, 서각 및 탁본뜨기, 불화그리기, 장승깎기, 삼천불 및 탑만들기, 염주만들기, 짚신삼기 등을 체험할 수 있다.

연등놀이는 연등축제를 마무리하는 순서이다. 두류네거리에서 반월당까지 이어지는 연등행렬 후 연희단의 가무행사로 이루어진다.

관등놀이의 역사
관등놀이(觀燈-)는 사월초파일에 부처님의 탄신을 축하하기 위하여 등에 불을 밝혀 달아매는 행사로 통일신라시대부터 행하였으나, 성행된 것은 고려조에 들어와서이다. 10세기에 고려 태조가 등놀이를 포함한 팔관회와 연등회를 국가적으로 장려하자, 이 행사는 고려조의 전 시기를 통하여 온 나라의 축제가 되었다. 이 행사를 10월 초겨울에는 서경(西京)에서 하고, 11월 15일에는 개성에서 거행하였다.

그 뒤로 천령(天靈)·오악(五岳)·명산(名山)·대천(大川)·용신(龍神) 등의 토속신을 제사하는 의식도 첨가되었다. 팔관회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숭유억불 정책의 영향으로 쇠퇴하였으나, 연등놀이만은 민간행사로 이어지게 되었다. ≪고려사≫에 의하면 최우(崔瑀, 고려 후기의 권신)가 집권한 이후 4월 8일인 석탄일에 행하였다 한다.

고려 때에는 초파일 며칠 전부터 아이들이 종이를 오려 기를 만들고, 물고기 껍질로 북을 지어서 마을 안을 돌아다니면서 등불을 켤 재료를 얻는데 이를 ‘호기(呼旗)’라 하였다.

조선조 세종 때는 사찰 이외의 가정에서는 연등을 달지 못하도록 금한 일이 있으나, 서울에서는 거리와 시장이 서로 경쟁해서 10여 길이나 되는 장대를 세우고 그 위에 등을 달았다. 장안에서는 현등(懸燈)하는 집이 많아 거리가 밝아져 사람들이 밤새도록 거리를 돌아다녔다고 ≪동국세시기≫에 기록되어 있다.

초파일의 현등은 민가와 사찰의 내용이 조금 다르다. 각 가정에서는 등간(燈竿)이라 하여 마당에 긴 장대를 세워 등대를 만들고, 꼭대기에 꿩의 꼬리털을 꽂아 장식하고 오색비단의 깃발을 늘어뜨린다. 꿩의 꼬리는 길상(吉祥)을 뜻하는 것으로, 우리 민족은 농기(農旗)의 꼭대기에도 흔히 이것을 꽂았다.

초파일 밤의 현등이나 불꽃놀이는 볼만한 구경거리가 되었다. 사람들은 거리에 나가 관등놀이를 즐겼고 인근사찰에 가서 관등을 했다. 조선시대에는 부녀자들이 절에 가는 것을 사회적으로 금기시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초파일만은 절에 가는 것을 허용하고 야금(夜禁)을 해제해서 관등의 흥청거리는 분위기를 북돋워 주었다.

관등행사가 세시풍속으로 정착하여 생활화함에 따라 <관등가>나 <등타령> 같은 노래도 생겨났다. 이들은 여러 가지 등(燈)의 명칭을 나열하면서 그 특징을 흥미롭게 노래로 엮은 것이다. 오늘날에도 사월초파일이 되면 절 경내는 빽빽한 관등의 대열로 가득 차 휘황찬란한 모습을 연출하고, 옛날의 성황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불교신도들의 연등행렬이 거리를 누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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